3. 청문당 그것이 알고 싶다 -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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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ree 댓글 0건 조회 886회 작성일21-07-27 11:35본문
3. 청문당 그것이 알고 싶다 - ①
<그림으로 그려본 청문당 현재 정경>
청문당은 부곡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부곡동은 현재 옹기마을 동쪽에 위치한 ‘개멸’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풍수로 보아 가마를 엎어 놓은 모양[伏釜形局]이므로
가마산[伏釜山]이라 했고, 그 후 마을이 형성되자 산 이름을 취해 가마골[釜谷]이라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개멸’로 소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곡동을 옛 이름으로 부르자면 ‘가마골’이 되고, 현재 이름은 가마골에서 가마를 뜻하는 부(釜)와 골짜기 곡(谷)자를 써서 부곡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청문당은 이곳에서 언제 만들어진 걸까요?
조선시대 선조 임금님이 계셨을 때 이곳 가마골(부곡동)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진주류씨 집안 사람들입니다.
안산 청문당은 진주유씨 16세손 유시회(1562~1635)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유시회는 원래 충청북도 괴산에 살고 있었는데, 선조의 9번째 딸인 정정옹주와 결혼하기로 한 분이 바로 유적이라는 분인데 그 분이 바로 진주유씨의 17세손이었습니다
유시회의 조카 유적이 선조의 아홉 번째 부마(왕의 사위)로 정해진 후, 유적의 아버지 유시행이 세상을 뜨자, (왕이)사위(유적)가 한양에서 괴산까지 무려 100㎞ 이상을 왕복할 것을 걱정하여
40㎞ 안쪽에 묘 터를 잡으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새 터에 묘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진주유씨는 청문당을 중심으로 넓은 사패지(왕이 내려준 땅)와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물고기와 소금에 대한 세금을 받을 권리)을 기반으로 안산에 살았으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조선 후기에는 기호남인(정치적으로 중요한 집안이었어요.) 3대 가문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안산 청문당은 조선 후기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 양반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더 나아가 실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사진 청문당 >
경성당도 있습니다. 경성당은 청문당 가까이 있습니다.
진주유씨 21세손인 유신(1748~1790)의 아들 유중서(1779~1846)가, 둘째 아들 유방(1823~1887)이 살림을 낼 때 지은 집입니다.
경성당은 원래 정재골에 있는 진주유씨 18세손 유명천·유명현 형제가 공부하던 서실인데, 후에 유원성이 빌려와 당호(건물의 이름)로 사용하였습니다.
경성당은 1850년경 건립된 가옥으로, 안채는 약 200여 년 전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약 170여 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아래채는 약 25년 전 철거되고, 그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물러난 자리에 시멘트 건물 한 채를 세웠습니다. 사랑채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안채 또한 약 25년 전에 철거하고 서울에 있던 한옥을 옮겨와 지었습니다.
안채의 재목은 서울의 미아리와 종로구 당주동에 있던 헌 한옥에서 많이 가져다 썼으며, 들보는 인천에서 구입한 수입목[미송]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원래는 사랑채 동남쪽에 각 1칸씩의 잿간과 뒷간, 그리고 3칸의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따로 있었고, 노비들이 기거하던 4채의 행랑채도 있었습니다.
또 사랑 마당 남쪽에 330.58㎡에 이르는 넓은 연못이 있었으나 사랑채 누마루 곁에 있는 우물물이 줄어들어 급수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40여 년 전 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할머니와 그의 아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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