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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문당 그것이 알고 싶다 -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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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ree 댓글 0건 조회 1,931회 작성일21-07-2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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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문당 그것이 알고 싶다 -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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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그려본 청문당 현재 정경>

 

청문당은 부곡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부곡동은 현재 옹기마을 동쪽에 위치한 ‘개멸’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풍수로 보아 가마를 엎어 놓은 모양[伏釜形局]이므로

가마산[伏釜山]이라 했고, 그 후 마을이 형성되자 산 이름을 취해 가마골[釜谷]이라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개멸’로 소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곡동을 옛 이름으로 부르자면 ‘가마골’이 되고, 현재 이름은 가마골에서 가마를 뜻하는 부(釜)와 골짜기 곡(谷)자를 써서 부곡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청문당은 이곳에서 언제 만들어진 걸까요?

 

조선시대 선조 임금님이 계셨을 때 이곳 가마골(부곡동)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진주류씨 집안 사람들입니다.

안산 청문당은 진주유씨 16세손 유시회(1562~1635)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유시회는 원래 충청북도 괴산에 살고 있었는데, 선조의 9번째 딸인 정정옹주와 결혼하기로 한 분이 바로 유적이라는 분인데 그 분이 바로 진주유씨의 17세손이었습니다

유시회의 조카 유적이 선조의 아홉 번째 부마(왕의 사위)로 정해진 후, 유적의 아버지 유시행이 세상을 뜨자, (왕이)사위(유적)가 한양에서 괴산까지 무려 100㎞ 이상을 왕복할 것을 걱정하여

​40㎞ 안쪽에 묘 터를 잡으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새 터에 묘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진주유씨는 청문당을 중심으로 넓은 사패지(왕이 내려준 땅)와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물고기와 소금에 대한 세금을 받을 권리)을 기반으로 안산에 살았으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조선 후기에는 기호남인(정치적으로 중요한 집안이었어요.) 3대 가문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안산 청문당은 조선 후기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 양반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더 나아가 실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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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청문당 >


경성당도 있습니다. 경성당은 청문당 가까이 있습니다.

 

진주유씨 21세손인 유신(1748~1790)의 아들 유중서(1779~1846)가, 둘째 아들 유방(1823~1887)이 살림을 낼 때 지은 집입니다.

​경성당은 원래 정재골에 있는 진주유씨 18세손 유명천·유명현 형제가 공부하던 서실인데, 후에 유원성이 빌려와 당호(건물의 이름)로 사용하였습니다.

경성당은 1850년경 건립된 가옥으로, 안채는 약 200여 년 전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약 170여 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아래채는 약 25년 전 철거되고, 그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물러난 자리에 시멘트 건물 한 채를 세웠습니다. 사랑채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안채 또한 약 25년 전에 철거하고 서울에 있던 한옥을 옮겨와 지었습니다.

​안채의 재목은 서울의 미아리와 종로구 당주동에 있던 헌 한옥에서 많이 가져다 썼으며, 들보는 인천에서 구입한 수입목[미송]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원래는 사랑채 동남쪽에 각 1칸씩의 잿간과 뒷간, 그리고 3칸의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따로 있었고, 노비들이 기거하던 4채의 행랑채도 있었습니다.

​또 사랑 마당 남쪽에 330.58㎡에 이르는 넓은 연못이 있었으나 사랑채 누마루 곁에 있는 우물물이 줄어들어 급수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40여 년 전 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할머니와 그의 아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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